사상 최고의 투수 싸이 영

타자하면 베이브 루스, 투수하면 싸이 영


 

1911년 시즌을 끝으로 사상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싸이영이 44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영은 511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뒤로 하고 다이아몬드를 떠났다.

바로 그 전설적인 싸이 영의 본명은 덴턴 트루 영이다. 1867년 오하이오주의 농촌에서 태어난 영은 1980년부터 1911년까지 22년간 빅리그 5개 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영은 통산 511승으로 다승 2위인 월터 존슨보다 94승을 더 거둔 전설 같은 투수였다.

마이너리그 시절 그의 공을 받던 포수가 패스트볼이 너무 빠르다고 해서 '싸이클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기자들이 '싸이(Cy)'라고 줄여 부르면서 은퇴할 때까지 마치 그것이 원래 이름처럼 불렸다.

그가 은퇴한지 100년이 돼가지만 아직도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512승은 물론이고 최다 이닝 출전(7355), 최다 선발 등판(815), 최다 완투(749), 심지어는 최다 패(316) 기록까지 모두 싸이 영이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기 불가능해 보인다.(빅리그 사상 싸이 영 외에 300패 이상을 당한 투수는 퍼드 갤빈(364승310패)뿐이다.) 특히 815차례 선발로 나서 그 중 749번을 본인이 경기를 끝냈다니. 입이 딱 벌어진다.

30승 이상을 거둔 시즌이 5번, 20승 이상이 10번이나 되는 싸이 영은 3번의 노히트노런을 펼쳤는데 그 중 한 번은 근대 야구 최초의 퍼펙트게임이었다. 통산 76번의 완봉승은 역대 4위다. <스포팅뉴스> 역대 100대 선수 중에 싸이 영은 14위에 올랐다.

영도 초창기에는 대단한 강속구 투수로 알려진다. 역시 스피드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빠른 공을 던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와 평생 호흡을 맞췄던 포수 치프 짐머는 손을 보호하기 위해 글러브 안에 소고기 덩어리를 넣고 경기에 나섰다고 한다. 1890년 빅리그 데뷔전에서 완봉승을 기록한 영은 시즌 마지막 날 더블헤더에서 두 경기 모두 승리 투수가 됐다.

MLB는 1892년에 홈플레이트에서 마운드까지의 거리를 종전의 50피트에서 현재의 60피트6인치로 멀찌감치 옮겼는데 당시 스포츠 저널리스트이던 로즈 네이어는 싸이 영이나 아모스 루시에, 주트 미킨 등의 강속구 투수들 때문에 거리를 늘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영은 1892년에도 36승에 평균자책점(ERA)1.93, 9번의 완봉승으로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영은 클리블랜드와 세인트루이스를 거쳐 1901년 새로 생긴 아메리칸리그의 보스턴 아메리칸스로 이적하면서 곧바로 리그 최고의 투수 자리에 올랐다. 다승, 삼진, 평균자책점에서도 모두 리그 1위를 차지했다.

1902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싸이 영은 하버드대학 팀의 투수코치를 맡아 선수들을 지도했는데 보스턴 지역 신문들은 '초등학교 졸업생인 영이 최고 대학 야구선수들을 지도했다'며 대서특필했다.

영은 또한 1900년대 초부터 자신의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슬로우볼'을 개발해 던졌는데, 그것이 오늘날 널리 알려진 '체인지업'이다.

싸이 영은 또한 최초의 월드시리즈에서 첫 공을 던진 투수다. 1903년 첫 WS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보스턴 사이에 벌어졌는데 홈팀 보스턴의 1차전 선발 투수가 바로 영이었다. 영은 첫 경기에서 1회초에만 4점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됐지만 두 번 더 선발로 나서 2승을 거뒀으며 5차전에서는 3타점을 올리는 등의 활약으로 우승(5승3패)의 주역이 됐다.

1904년에는 영의 명성에 도전장을 던진 투수가 있었다. 그 해 5월 2일 보스턴을 맞아 1안타 완봉승을 거둔 필라델피아 에이스의 루미 워델은 싸이 영과 맞붙어 똑같은 능력을 보이겠다고 큰 소리했다. 그의 소원대로 3일 후에 영과 맞대결을 벌였는데 결과는 루비의 큰소리와는 반대로 나왔다. 영이 AL 사상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것이다. 루비는 27번째 타자로 나와 플라이아웃으로 퍼펙트게임을 마감했다.

영은 그 퍼펙트게임을 시작으로 24.2이닝, 즉 73타자 연속 무안타의 대기록을 세웠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영은 아울러 45이닝 무실점도 기록했다. 영과 워델은 1907년에 13이닝 0-0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1908년 6월 30일 영은 41세의 생일이 3개월 지난 시점에 자신의 세 번째 '노히터'를 기록했다. 놀란 라이언이 43세에 노히터를 기록하기 전까지 82년 동안 최고령 노히터 기록이었다.

1911년 9월 22일 영은 피츠버그를 상대로 1-0 완봉승을 거두며 자신의 511번째 승리를 장식했다.

1890년대부터 1911년까지 선수생활을 한 싸이 영은 야구가 근대화로 넘어가는 시기의 다리 역할을 한 인물로도 추앙받는다. 그가 처음 프로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투수들은 언더핸드로만 던질 수 있었으며, 파울은 스트라이크가 아니었다. 그가 빅리그 생활을 시작하고 4년 후 현재의 투수 마운드 거리가 정해졌으며, 6년 후부터 글러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 불같은 강속구로 유명하던 영이지만 그는 항상 제구력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투수였다. 그래서 강속구가 사라진 40대 초반까지 효과적인 피칭을 할 수 있었다. 영은 1893년부터 1903년까지 14년 동안 9이닝당 볼넷 부문에서 13번이나 리그 1위였고 다른 한 번은 2위였다. 22년 생애 동안 이 부문에서 16위 이하로 떨어진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400이닝 이상 던진 시즌이 5번에 300이닝 이상 던진 시즌이 11번, 40번 이상의 완투를 기록한 시즌을 9번이나 기록한 투수의 성공 원동력은 초, 중반기에는 강속구와 제구력의 조화 그리고 후반기에는 제구력과 경험이다.

1937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싸이 영은 1955년 11월 사망했다. 첫 '싸이영상'의 영광은 1956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 뉴컴에게 돌아갔다. 처음에는 양 리그를 통틀어 단 한 명의 투수에게 싸이영상을 주다가 1976년부터 양 리그에서 각각 한 명씩 최고 투수에게 싸이영상이 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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