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경기의 발전

농구경기의 발전


네이스미스에 의해 1892년 농구경기가 공개된 이래 1893년 최초의 농구경기 규칙서가 발행되었는데 여기에는 경기규칙뿐만 아니라 용구에 대한 규정도 함께 있었다. 그중 '바스켓은 강한 쇠바퀴로 되어 있다'라는 바스켓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이는 그동안 사용되어 오던 복숭아 바구니가 철제의 링으로 바뀌게 되는 최초의 규정이었고, 밑바닥이 막혀 있는 네트도 이 때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기존의 바스켓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착안한 것이 끈을 만들어 골이 들어갈 때마다 잡아당기면 바스켓이 거꾸로 회전하면서 자동적으로 볼이 굴러 떨어지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실내 경기장이 아닌 옥외에서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임시방편으로 철 기둥을 세워 그것에 부착해 놓고 링을 설치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농구 골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각 지역에서 농구경기가 개최되었으나 소규모 대회로만 치러졌을 뿐 오늘날의 대규모 대회는 열리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대규모의 토너먼트 경기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YMCA 지부의 시도로 가능해 졌는데 1896년 4월 26일 미국 브루크린(Brooklyn)에서 역사적인 최초의 전국규모 대회인 '챔피언십 오브 아메리카(Championship of America)'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경기의 결승전은 뉴욕 시의 이스트 지구 대 브루크린 센트럴과의 경기였는데 4:0으로 이스트가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학간 최초의 토너먼트 경기는 1895년 2월에 실시되어 미네소타 주립 농구학교와 햄린 대학이 결승에서 맞붙어 9: 3으로 미네소타 주립 농구학교가 이겼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을 중심으로 한 농구경기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934년 12월 29일에는 대학간 경기인 제1회 내셔널 대회가 뉴욕 주 스퀘어 가든에서 실시되었다. 1만 6,000여 명의 관중이 모인 뉴욕대학 대 노트르담 대학의 결승전에서는 뉴욕 대학이 25: 18로 승리함으로써 전국 규모대회의 첫 우승교가 되었다. 또 5년 후인 1939년에는 NCAA 주최의 선수권대회가 열렸고, 결승전에서 오리건 대학이 46: 33으로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이기고 첫 챔피언의 영광을 획득했다.

네이스미스 이후 농구경기는 계속적인 수정을 거쳤으며, 농구용품과 용구도 날이 갈수록 진보되어 갔다. 물론 경기의 기술과 전술도 여기에 맞게 변화하였다. 농구경기가 선수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기기술과 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경기가 점점 흥미스러워졌다. 그만큼 개인의 기술혁신이 농구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농구경기기술의 발달


생전 처음으로 접하게 된 익숙하지 않은 경기에서 양 팀의 선수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공격은 무작정 바스켓에 볼을 던져 넣으려고만 했고, 수비는 이것을 무조건 방어하려는 노력만 했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기술의 전부였던 까닭에 오로지 던지고, 막는 기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경기는 예상했던 대로 파울이 속출했다. 강력한 수비에 의해 파울이 이어지자 수비를 피하기 위해 멀리에서 슛을 하기도 했지만 좀처럼 골인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차츰 패스를 위주로 하는 팀웍(team work)을 생각하게 되었다.

경기 본래의 원칙이 유지되는 동안 규칙은 해마다 변하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용구의 개조와 조정은 농구경기가 빠르게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농구가 발생한지 3년 만에 한 팀 선수는 현재와 같은 5명으로 줄게 되었는데 포워드 2명, 센터 1명, 가드 2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동안은 한 팀이 9명으로 구성되어 정적인 상태의 경기가 되다가 5명으로 바뀌면서 농구기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넓어진 경기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개인기술이 개발되었고, 보다 빠른 농구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선수들은 볼을 잡고 걷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이 시기에 와서 빠른 속력으로 볼을 잡게 되면 걸어도 좋다는 규정이 허용되었고, 후에 이것이 드리블(dribble)로 발전하면서 농구는 훨씬 기동성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초창기에 포워드는 슛과 공격능력의 향상, 센터는 패스와 공격기술, 가드는 방어를 위한 기술연마에 힘썼다. 가드는 상대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경기장의 최종 수비선에 머물렀다. 경기장의 중앙에서만 경기하던 센터는 공격력의 강화를 위해 곧 두 포워드와 협력하게 되었으며, 수비만 하던 가드는 둘 중 한 사람이 공격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 때에는 골인이 될 때마다 실시하는 센터 점프볼이 공격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으므로 키가 큰 센터가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특징이었다.

농구경기의 획기적인 발전은 서서 수비만 하던 1명의 가드가 공격에 가담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2명의 가드가 공격에 참가함으로써 현재의 스크린(screen)공격, 픽업(pick-up) 및 지역방어와 대인방어의 형태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대인방어에 대응하는 공격방법으로 스크린 플레이가 나오게 되어 성공을 거두자 지역 방어의 출현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동안은 슛이 좋은 팀에게만 실시해 왔고, 다소 느슨한 방어라고 여겨졌던 지역방어는 시간을 지연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강력한 수비형태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모든 팀들이 지역방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농구경기는 느리고 흥미 없는 경기가 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기를 재미있게 할 새로운 경기규칙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게 된 규칙이 공격자가 상대 코트로 빠르게 이동하도록 정한 10초룰(ten second rule)이고, 골인이 될 때마다 실시하던 센터 점프볼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농구경기는 속공(fast break)의 형태를 갖춘 훨씬 스피드 있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키 큰 선수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몇 개의 규칙이 만들어졌다. 즉 프리드로우 구역(free throw area)에 적용되는 3초 룰(threesecond rule)과 프리드로우 구역을 넓히게 된 것, 수비자는 볼이 림(Rim) 위에 떠 있을 때 볼이나 림을 건드리거나 손이 림을 통과해서 안 된다는 규칙 등이 그것이다.

1932년 제10회 L. A. 올림픽대회 때에 국제농구연맹(F.I.B.A. : Federation International Basket Amateur)이 창설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통일된 규칙이 마련되었다. 농구는 다른 경기보다 비교적 규칙을 자주 개정하여 보다 흥미 있고 스피디한 스포츠로 발전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장신의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하여 키에 제한을 두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며, 많은 관객이 즐겨 볼 수 있는 농구경기의 발전은 크게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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